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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오릉(新羅 五陵) 전경(사적 제 172호) |
신라 오릉(新羅 五陵) 전경(사적 제 172호)
소재지: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77번지(제향일 매년 春, 秋分日)
시조왕께서 돌아갸셨을 때 장지의 기록에서 『국도에서 7리쯤 떨어진 담암사(曇岩寺) 북쪽 남정(南亭) 수풀속』 이라 하였는데 지금의 경주시 탑동(塔洞)을 이른다.
신라시대에는 시조의 능(陵)이기 때문에 국력을 들여 수호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고려조부터 조선조 세종때까지는 어떻게 수호하였는지 기록이 없다. 세종 11년에 숭덕전(崇德殿)을 지어 시조왕을 제사 지내기 시작한 것을 보면 조선조에서도 오능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지금의 규모로 능역(陵域)을 넓히고 단장은 한 분은 박정희(朴正熙, 1917~1979) 대통령이었다. 지금의 능역(陵域)은 약 6만평에 이르고 담장으로 완전히 들러쳐서 함부로 범경할 수 없도록 했고, 관리동 등을 새로 지어 경주시에서 관리하고 있어서 무시로 드나들 수 없도록 통제 함으로서 잡인들이 왕릉을 훼손 할 수 없게 하였으며 능역 안에는 전부에 단디를 심고 주변을 깨끗이 관리함으로써 왕릉으로서의 위엄을 느낄 수 있다. 이곳은 추분에 향사를 하고 있다.
1. 신라 시조왕릉(始祖王陵)
시조왕은 BC69년에 박과 같이 생긴 알에서 태어나서 13세 되던해에 6촌장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 되었다. 나재위 61년(서기4년)에 73세로 훙서(薨逝)하시어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2. 시조왕 알영왕비릉
알영 왕비도 태어날 때는 보통 사람들과는 달리 용의 오른쪽 갈비 밑에서 태어났다. 용이 알영씨를 낳을 때 알영정이라는 우물가에서 낳았음으로 알영이라 이름을 지었다. 시조왕을 받들어 내조를 잘 했음으로 백성들이 시조왕과 더불어 이성(二聖)이라 칭했다. 왕이 돌아가신지 7일만에 돌아가시자 이곳에 능(陵)을 조성하였다.
3. 신라 제2대 남해왕릉
서기4년 시조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고 현인(賢人) 석탈해를 맏사위로 삼고 왜구의 침범을 잘 막았다. 재위 20년에 74세의 수를 누리고 서기24년에 훙서(薨逝)하시어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4. 신라 제3대 유리왕릉(儒理王陵)
서기 24년 남해왕의 태자로 남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전국을 돌며 가난하고 나이 먹은 사람이나 고아 등을 잘 보살피고 길쌈을 장려하기 위해 가배(嘉俳)라는 놀이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전해져서 가배를 가위라고도 하는데 팔월 보름 명절이 그것이다. 또 17등급의 관직을 제정하기도 했으며 6촌장에게 성을 하사(下賜)했다. 제위 34년, 서기57년에 훙서(薨逝)하시어 이곳에 능을 조성하였다. 제4대 왕은 남해왕의 맏사위인 석탈해에게 왕위를 전위했다.
5. 신라 제5대 파사왕릉
서기 80년에 신라 제4대 탈해왕의 뒤를 이어 유리왕의 둘째아들인 파사왕이 즉위했다. 재정을 확충하고 수도와 변방에 성을 쌓는 등 국방에 힘썼다. 가야국등의 침략에 잘 대응하여 나라를 지켰다. 재위 32년 서기 112년에 훙서(薨逝)하시어 이곳에 능을 조성하니 이때부터 오릉이라 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