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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시 박재궁마을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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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종회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22-07-28 13:51 조회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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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인터넷 지역 문화 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우리의 선조가 모셔져 있는 묘역의 유래에 관한 내용이니 많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 


박재궁 묘역은 경기도 고양시 주교동 박재궁 마을에 있다.

고려 때부터 조성되어 광해군 때까지 300년 간 53위의 묘소와 11위의 제단을 모신 밀양 박씨 가문의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는 장소이다. 이 곳에 묻힌 사람 중 박충원과 박심문은 단종에 대한 충절로 유명한 위인이다. 현재 박재궁 마을은 화려한 묘역과 주택가가 섞여 있다.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에서 마상 공원 뒤쪽으로 가면 ‘박재궁 마을’이라는 묘한 이름의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공교롭게도 마을 초입에 궁도장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박재궁과 궁도장을 연결지어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그 둘은 아무 상관이 없다.

재궁(齋宮)은 본래 국왕이 제사를 준비하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서, 재실(齋室) 즉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집이 아주 규모가 큰 경우에는 재궁이라 불렸다고 한다. 

 

박재궁 마을이란 명칭은 바로 이 지역에 밀양 박씨 가문의 묘역과 재궁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실제로 박재궁이란 지명은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1755년 영조 연간에 발간된 고양군지에도 ‘박재궁촌’이라는 이름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박재궁 마을에 가면 추원재라는 재실이 있고 상당히 큰 규모의 묘역(3개가 하나를 이루고 있다)과 여러 신도비(고관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죽은 사람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를 함께 세워둔 신도비군이 있다. 마을 자체는 전체적으로 보면 연립주택, 아파트, 빌라 등이 뒤섞여 일반적인 주택가와 다를 바 없으나, 규모가 큰 묘역과 재실이 있고 구석구석에 오래된 기와집들이 자리하고 있어서 아직 이곳과 과거를 연결하는 끈이 살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재궁 표지판 이미지

- 박재궁 표지판 -


  밀양 박씨 가문이 처음 이곳에 묘역을 마련한 것은 1370년 고려 때 추성익위공신 전법판서 겸 상장군 사경 공을 처음 안장하며 시작되었다. 이후 조선 광해조에 이르기까지 300년간, 53위의 묘소와 11위의 제단, 그리고 배위까지 합하면 전부 90여위를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1589년 지사 이의신은 답산기에서 이 박재궁 묘역에 대한 글을 다음과 같이 남긴 바 있다. 

"삼각산에서 떨어진 외맥이 서쪽으로 물 같이 평평하게 서너번 흘러 주원에 들어온 맥이 낮게 오다가 다시 봉우리로 솟았다가 완만한 등성이를 이루고 허술한 듯 내려가다가 뚝 떨어져 혈을 맺었으니 대지(大地: 좋은 묏자리)이다. 전면이 조금 완만하게 굽고, 혈도가 조금 노출된 것이 한스러우나 이 세상에 이만한 땅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한편으로 고개가 끄덕여지면서도 한편으로 우리가 과거의 유산을 존중하는 의미가 어디에 있는지 조금 더 생각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아무튼 밀양 박씨 선조께서 묏자리를 잘 쓰셔서 인지 몰라도 이 묘역에 묻힌 조상들 중에는 큰 벼슬을 한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고려 중엽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종3품)을 지낸 박현, 대제학을 지낸 박충원, 영의정을 지낸 박승종, 형조참판을 지낸 박자흥, 우문관대제학을 지낸 박시용,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박연 등이 있다. 

특히 박충원의 묘는 전체 묘역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는 조선 중종 2년(1507)에 태어나 선조 14년(1581)에 돌아가신 충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영월군수를 거쳐 대제학, 이조판서,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낙춘박선생유고’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한 인물이다. 박충원이 영월군수로 재직할 당시 돌아간 단종의 현신과 화답하고 단종의 묘역을 장릉으로 조성한 것이 현재까지도 일화로 남아 있다. 


박재궁 밀양박씨 묘역 이미지

- 주교동 박재궁 묘역 -


 단종과 관계된 밀양 박씨 인물들은 더 있는데 역시 박재궁 묘역에 묻혀 있는 청제 박심문도 그중 하나다. 박심문은 단종의 충신으로 단종 복위를 모의했던 사람이다. 그는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던 길에 단종 복위 계획이 들통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압록강에서 자결을 하면서 자신이 신던 신을 집으로 보내, 신이 집에 도착한 날을 자신의 기일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다. 후손들은 신발과 옷가지가 도착한 날 박재궁의 선영 밑에서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008년 밀양 박씨 후손이자 이 지역 주민인 박원석씨가 조상 대대로 보관해 온 ‘충절록’을 고양신문사에 가져가 감정을 의뢰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충절록’의 또 다른 판본인 ‘청제박선생충절록’은 국립중앙도서관에도 보관되어 있다.

 

재미있게도 ‘박재궁’이라는 마을 이름은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에도 있다. 지금은 아니지만 그곳에도 과거에는 밀양 박씨의 묘가 수십기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고양시의 박재궁처럼 오랫동안 유지되다가 근대의 개발 바람에 버티지 못하고 주택가 부지로 팔렸던 것 같다. 고양시 박재궁 마을의 밀양 박씨 묘역은 현재에도 상당히 면적이 넓은데, 원래 국왕으로부터 하사 받은 땅은 지금보다 훨씬 더 넓었다고 한다. 지사 이의신 선생이 지적했듯 ‘좋은 묏자리이나 한두 가지 한스러운 점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과거 고관대작을 지낸 한 가문의 묘역을 애써 보존해야 하는 의미를 우리가 찾지 못하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박재궁의 넓고 당당한 묘역과 다소 빈한한 주택가의 조화는 어딘가 낯설고 아쉽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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