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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始祖) 박혁거세

시조왕 박혁거세

 

신라(新羅) 시조왕(始祖王)으로 기원전(紀元前 BC)69년 7월에 탄강(誕降)하시고 서기 4년 3월에 향년 73세로 훙서(薨逝)하시었다.

시조왕(始祖王)의 성(姓)은 박(朴)이요 휘(諱)는 혁거세(赫居世) 왕호는 거서간(居西干) 국호(國號)는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며 61년 동안 왕위에 오르셨다.

왕비(王妃)는 알영(閼英)부인으로 기원전 53년 4월에 왕비가 되어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으며 시조왕께서 훙서(薨逝)하신지 7일 뒤에 하세(下世)하시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시조왕의 탄강기(誕降記)에 대해서 적기를, 경주지방에 6촌(六村)이 있었는데, 고허촌장(高墟村長) 소벌공(蘇伐公)이 양산(楊山) 중턱에 있는 나정(蘿井) 곁 숲속에서 말(馬)한 필이 소리높이 울고 오색(五色)구름이 떠오르는데 신선인 듯 엎드려 절하는 모습이 비치는지라 이상하다 생각되어 얼른 가서 보니 말은 간곳 없고 다만 한 포태(胞胎)가 알(卵) 같기도 하고 박처럼 생기기도 한 것이 있어 그 포태를 헤쳐보니, 어린아이가 나왔는데 얼굴이 아름답고 단정(端正)하므로 양육(養育)하니 십여 세의 나이에 벌써 기골이 준수하고 대인의 기풍이 있으므로 6부 촌장들이 모여 의논 임금으로 추대하여 시조왕에 올라 경주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으니, 기원전 57년(漢宣帝5 鳳元年甲子)의 일이요. 시조왕의 보령(寶齡) 13세 때의 일로 뒷날의 신라국(新羅國)이다.

 

알영(閼英)왕비는 마음이 어질고 착하시어 내조를 잘 하였으므로 그 때 사람들이 왕과 왕비를 말하여 두 성인(聖人)이라 하였다.

시조왕은 기원전 41년(庚辰)에 왕비 알영부인과 함께 6부를 순무(巡撫)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였다.

 

시조왕 19년(기원전 39)에 변한(卞韓)이 나라를 바쳐 항복하였으며, 시조왕 21년(기원전 37)에 경주 도읍에 성을 쌓고 금성(金城)이라 하였다.  시조왕 30년(기원전 29)에 낙랑(樂浪)이 침입하여 왔으나 “이 지방 사람들은 서로 도적질을 하지 않으니 도의가 있는 나라다”하고 군사를 이끌고 스스로 물러갔다. 재위(在位) 61년 되던 해 서기 4년(甲子) 3월에 훙서(薨逝)하시니 경주(慶州) 담암사(曇巖寺) 북쪽에 장사하였다. 훗날에 알영왕비와 남해왕(南海王), 유리왕(儒理王), 파사왕(婆娑王)을 같은 경내에 장사 모시니 지금의 오릉(五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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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기원전 6년 9월에 좌명공신(佐命功臣) 6부 촌장과 개국공신(開國功臣) 20여 명을 거장전(擧章殿)에 초청하여 만복연(萬福宴)을 베풀어 군신간의 정의(情誼)와 공덕(功德)을 기리신 바 있었는데, 후세에 와서 그 일이 거장보(擧章譜)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세종(世宗) 11년(1429) 7월에 오릉 옆에다 시조왕의 묘전(廟殿)을 건립 숭덕전(崇德殿)이라 하고 춘추중월(春秋仲月, 2월, 8월)에 향축(香祝)과폐백(幣帛)을 내려 제향(祭享)토록 하였다.

 

선조(宣祖) 25년(1592)에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하여 묘전(廟殿)이 불타 소실되었으나, 다행이 위판(位版)은 당시 묘전(廟殿)의 수복(守僕) 박언수(朴彦秀)가 시조왕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경주 선도산(仙桃山) 성모사(聖母祠)로 피난하여 그 신위를 고이 모셔 보전(保全), 무사하였다.

경종(景宗) 3년(1723) 6월에 시조왕의 묘호(廟號)를 숭덕(崇德)이라 사액(賜額)하여 다음 달인 7월 22일에 사액 현판을 걸었다. 이로부터 처음으로 전참봉(殿參奉)을 두어 향사를 모시도록 하였다.

 

현대문명에 이르러 현대사학자들이 연구발표하여 한국방송공사(KBS)에서 방영한 역사스페셜(2005년 6월 24일) “신라건국 사실을 나정은 알고 있다”에서는 시조왕 박혁거세의 탄강신화를 요약하여 정리하기를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는 북방 기마민족(騎馬民族)의 후예로 경주지역 나정으로 이주해 온 사람이라 했다. 이 시절 강력한 철제무기와 기마문화를 가지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이주(移住)해 온 박혁거세는 경주의 6촌장을 하나로 통합하고 새로운 국가를 열었다. 신라는 그렇게 시작됐다”하였다. 또한 알영부인의 탄강 사실을 두고는 삼국유사에 적기를 알영정(閼英井)에 용이 나타나 오른쪽 갈비뼈에서 여자아이를 낳았다. 한 노파가 이상히 여겨 데려다 길렀는데 우물이름을 따서 알영(閼英)이라고 불렀다. 자라면서 덕기가 있었으니 왕이 이를 듣고 왕비로 삼았다 하였으며 위에서 기록한 것과는 달리 삼국사기에 적은 신라의 건국신화를 이렇게 해설하여 전하기도 한다.

 

“나정(蘿井) 숲에서 말이 울고있어 가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 났는데 6촌(六村)사람들이 그 출생을 신기하게 생각해 높이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다.”하였으며, 선도산(仙桃山)의 성모사(聖母祠)에 대하여는 삼국유사에서 “성모(聖母)는 중국황제의 딸이라 하였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살다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곧 박혁거세(朴赫居世)다”라고 하였다.

 

※ 임금으로으로 추대한 경주지방(慶州地方) 6부 촌장에 사성(賜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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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정비각(蘿井碑閣)(시조왕께서 탄생하신 장소)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신라(新羅)의 시조왕이신 박혁거세(朴赫居世)가 탄강(誕降)하신 곳을 잊지 않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비각을 세운 곳이다.

서기 기원전 70년, 그 때에는 지금의 경주가 진한(辰韓) 땅이었는데 고조선(古朝鮮)이 망하자 그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이 경부 부근의 바닷가나 산 속에서 6개의 촌락(村落)을 이루고 살고 있었는데 임금은 없었고 촌장(村長)들만이 있었다.

이를 걱정하던 촌장들은 3일 동안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마치고 고허촌장(高墟村長)이었던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양산(楊山) 쪽을 바라보았더니 바로 옆에 있는 나정(蘿井)에서 오색(五色)의 구름 속에 용마(龍馬)가 크게 울고 있고 그 옆에는 선인(仙人) 한사람이 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급히 달려가 보았더니 박과 같이 생긴 포(胞)가 하나 놓여 있어서 깨 보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이아기가 후일에 시조왕이다.

아기를 조심스럽게 안고 동천(東天)으로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光彩)가 나고 모양은 예쁘고 단정하게 생겼는데 옆에 있던 새나 짐승들이 모두 춤을 추어 아기의 탄생을 즐거워했다.

나이 13세가 되어 어른같이 숙성(熟成)해지자 6촌장들이 추대(推戴)해서 왕으로 모셨다.

나정의 비문은 경상도 관찰사 남공철(南公轍)이 짓고 경주부윤(慶州府尹) 최중헌(崔重獻)이 제목글자와 비석의 글자를 썼고 후손들이 돈을 내어 세웠다.

사진은 1997년에 촬영한 모습이고 현재는 나을신궁(奈乙神宮) 복원(復原) 공사를 위해 비각을 헐어낸 뒤 이 일대가 대대적인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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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영정 비각(閼英井 碑閣) 전경

소재지: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77번지 오릉원 내

 

신라 시조왕비(始祖王妃)인 알영씨(閼英氏)가 탄생한 곳을 잊지 않기 위해 비를 세우고 그비석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집이다.

알영 왕비가 태어나실때도 신이(神異)한 바가 있었다.

하루는 용(龍) 한 마리가 알영정(閼英井) 우물가에 나타나더니 오른쪽 갈빗대 밑으로 여자아기를 낳고 사라졌다.

이 동리에 살던 노파가 이 것을 목격하고 이상하게 생각해서 아기를 거두어 길렀다.

그리고 알영정 우물가에서 낳았다 하여 이름을 알영이라 지었는데 자라면서 덕이 있어 왕비가 되었고 왕비가 된 후에는 백성을 사랑하고 내조를 잘 해서 시조왕과 더불어 이성(二聖)이라 칭송(稱頌)을 받았다.

그러나 두 분이 다 신이(神異)하게 태어나셔서 이성(二聖)으로 불릴만큼 덕이 많았는데 시조가 탄생하신 곳에는 비가 있고 왕비가 탄생하신 곳에는 표지조차 없으니 「이렇게 차별해서야 되겠는가」하고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후손 중에 해린(海麟)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전에 현릉 참봉을 지낸바가 있다.

이 분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허물이다. 목욕하는 곳도 마을에서 표지를 하고 또 활을 쏘는 곳도 마을에서 표를 해 두는데 하물며 성스러운 왕비가 탄생하신 곳인데 더 말해서 무엇하랴」 하고 우물가에 비석을 세우고 〈신라 시조왕비 탄강유지〉라고 새겼다.


 

역리학(易理學)으로 본 최고의 명당(明堂)

        박혁거세능(朴赫居世陵)

       《박씨도시조(朴氏都始祖)》  

                                                                         청암 박 광 호

                                     

 천 년의 고도(古都) 경주 땅은 우리나라에서 고유한 문화재가 가장 많은 고장이다. 아직까지도 고적 유물이 서라벌 일대에 흩어져 있어서 땅을 파기만하면 발굴되어 조상들의 얼이 빛나고 있다.

 경주 땅은 원래 진한육부(辰韓六部)의 촌락으로 배달겨레들이 산곡(山谷) 사이에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남산 북쪽, 오릉 지역 李氏)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남산 서남쪽 내남면 일대 崔氏) 취산진지촌(嘴山珍支村=황룡사지 남쪽 낭산 일대 외동읍 鄭氏)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경주 서면 모량천 유역 일대 孫氏)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경주시 양남면 양북면 감포읍 裵氏)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경주시 보문 일대 천북면 일대 薛氏) 등 여섯 마을로 나뉘어 살았으며 그뒤 신라(新羅)의 옛 수도가 된 곳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한(漢)나라 오봉(五鳳) 원년(BC 57)에 신라 시조 박혁거세가 처음 나라를 열고 도읍을 세워 국호(國號)를 서야벌(徐耶伐)이라 하였다 전한다. 뒷사람들이 무릇 왕도(王都)를 말하려면 서벌(徐伐)이라 하여 차츰 변음되어 서울(徐菀)이 되었다.

서야벌은 사라(斯羅)라 부르기도 하고 사로(斯盧)라고도 하다가 다시 신라(新羅)라 하였다. 4대 탈해왕(脫解王=昔氏)때에 시림(始林)에서 괴이한 닭의 울음이 있은 후 계림(鷄林)이라 고치더니 15대 기림왕(基臨王=昔氏)때애 다시 新羅로 하였다. 고려 태조 18년(935년) 경순왕(敬順王 56대)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니 新羅 사직(社稷)은 끝이 나고 경주(慶州)라 했고, 태조 23년(940년)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되었다가 고려 6대 성종(成宗)이 동경유수(東京留守)로 고치고 한때 영동도(嶺東道)에 예속시켰다. 그뒤 조선조(朝鮮朝) 3대 태종(太宗)이 다시 경주라 이름 지었다.

 경주 땅의 산과 들이 빼어나 특이하며 풍경은 기이하고 산세가 절묘하여 이곳을 형가(形家=풍수지리를 따지는 학파)에서는 회룡고조(回龍顧祖=용이 돌아본다는 뜻, 산의 지맥이 본산(本山)에서 쭉 뻗어내려 오다가 가지가 휘돌아서 본산과 마주 대하는 산세를 일컫는 말로, 항상 근본을 돌이켜 감사하고 보은하고 함께 하라는 뜻으로도 쓰임. 안동권씨의 모역도 이런 형상)의 지형으로 최고의 명당이라는 것이다. 또 경주 시내를 형산강(兄山江)이 흐르는데 형산강도 경남 울산시 두서면에서 발원하여 경주를 지나 동쪽으로 휘돌아 흐르는 큰 강이 되어 포항을 거쳐서 바다로 흐르고 있다.

『삼국사기』에 당 태종(唐太宗) 말하기를 경주는“진실로 군자의 나라로다”라고 하였으며,『수서(隨書)』에는“의복의 빛깔은 흰색을 숭상하며 부인들은 머리털을 길게 땋아 늘여 머리에 두르고 여러 가지 비단과 구슬로 꾸민다.”라고 실려 있다. 기록에 의하면 사물의 만사가 흥(興)하고 폐(廢)하는 것은 만고의 법칙이듯 한번 성하고 나면 한번 쇠하게 되는 것 또한 시운(時運)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

 

평양지맥(平洋地脈) 이루고 행주형(行舟形) 형국

 

 경주 땅을 지맥(地脈)으로 살펴볼 때 원맥이 태백산맥(太白山脈)으로서 동해변을 끼고 남으로 내닫는 줄기다. 한 가닥은 장군봉(將軍峰)을 거쳐 동쪽으로는 백암산(白巖山)으로 뻗어가고 서쪽으로는 일월산(日月山)을 거쳐 청량산(淸凉山)으로 내려오다가 다시 기봉(起峰)하여 향로봉(香爐峰)을 이룬다. 향로봉을 이룬 일맥(一脈)이 서남방으로 뻗어 보현산(普賢山)을 거쳐 대구의 팔공산(八空山)으로 끊기고, 다른 一脈이 동남으로 동해를 끼고 달리다가 포항(浦項)과 영일(迎日)을 거쳐 경주 토함산(吐含山)으로 맺는다.

 산세의 형국으로는 낭산(狼山)이 동쪽에 솟아 있어서 경주의 진산(鎭山)이 된다. 다시 동쪽으로 토함산(東嶽)이 있고 북쪽으로는 금강산 함나현(含羅峴) 성현(成峴)이 있고, 서쪽에는 비월동산(非月洞山) 선도산(仙桃山) 울개산(蔚介山) 지화곡산(只火谷山) 단석산(斷石山=月生山)이 있고, 남쪽으로는 금오산(金鼇山=南山)과 복안산(伏安山) 묵장산(墨匠山) 인박산(咽薄山) 등이 높고 낮게 연이어 솟아있다. 그 사이로 여러 계곡이 흘러내려 추령(楸嶺)에서 흘러나와 굴연(堀淵)으로 드는 줄기를 동천(東川=閼川)이라한다.

 또 한줄기 서천(西川)이 있으니 근원이 셋이다. 하나는 인박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묵장산에서 다른 하나는 지화곡산에서 근원을 이루여 형산포로 들어간다. 또 북쪽에는 굴연천이 있는데 이 내가 西川의 하류를 형성하며 흐른다. 사등이천(史等伊川=荒川)의 물줄기는 근원이 토함산에서 나와 西川으로 흘러간다. 이 땅의 지세는 평양지맥으로 이루어져있다. 좌방(坐方)이 高大하여 생왕(生旺)이 내조(來朝)하고, 앞뒤가 모두 낮아서 혈성(穴星)이 약간 불룩할 뿐이다.   

 신라가 한 때 황금시대를 이루어온 것은 지리학의『명당여장심(明堂如掌心)하면 가부두량금(家富斗量金)=명당이 손바닥 가운데 같으면 부유하기를 금전을 말로써 헤아린다.』〔왕방(旺方=왕성한 지기(地氣)가 미치는 곳)의 조수가 一夕만이라도 明堂 전방에 모이면 가부(家富)한다〕라는 원리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하사(下沙)가 역류일척(逆水一尺)이라도 가히 치부한다』하였으니 이 땅을 감싸고 흘러가는 문천강(汶川江)의 물은 현류(顯流)로 내려가는데 모래는 역류(逆流)로 치솟는 괴이한 내이기도 하다.

 지리설(地理說)에 평양지(平洋地)는 역수(逆水)와 역사(逆沙)가 있는 곳이 가장 좋은 땅이라 하였다. 대개 물이란 곧게 흘러가게 마련인데 역수나 역사가 있으면 물 흐름이 반드시 길게 빙빙 돌아 유정(有情)하게 흐르게 마련이다. 또한 평양지에서 가장 좋은 것이 금성수(金城水)와 만궁안(彎弓案)이라 하였다. 금성수는 주로 부(富)하며 만궁안은 주로 귀(貴)하다. 겸출수여(兼出秀女=지혜와 총명이 겸비한 여자(알영부인)가 함께 태어남)하고 혈전안산(穴前案山=혈맥 앞에는 안석한 산)이 층층 고향(高向)이라야 명당 조건에 합당하다 하였다. 이 땅이야말로 평양지리학설(平洋地理學說)에도 해당되는 대명당지(大明堂地)인 것이다. 지리학설로 구별하면 平洋과 산지(山地)는 부동(不同)하다. 山地는 산봉우리를 귀인(貴人)이라하고 평양지는 산이 없으니 면전(面前)에 요(凹)가 없으면 貴人이라하고 凹가 없고 철(凸)이 있어도 貴人이라 이른다. 산이 있으면 산을 논하고 없으면 물을 논하게 되니 水地가 곧 山峰이 되며 소해(小海)가 곧 문총(文鏦)이 되는 것이다. 이 땅이 평양연맥(平洋連脉)의 세를 갖추어 있으면서도 주위가 넓어 크고 작은 봉우리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을 이루어 놓았으니 어찌 만 년의 덕화(德化)가 끊길 수 있으랴? 형국이 행주형(行舟形=항해하는 배의 형상)으로 창파에 달리는 뱃머리와 같다. 행용(行龍)은 갑묘룡(甲卯龍)으로 갑좌경향(甲坐庚向) 서향판(西向辦)으로 자리했다.

 

하늘에서 이인(異人)을 보내어 원시생활을 개화

 

 新羅의 시초에는 하늘이 이인(異人)을 보내어 원시의 생활을 개화시키고 나라를 세워 임금과 신하가 서로 도와 어질고 후하게 정치하며 살았다. 三姓(朴·昔·金)이 서로 엇바꿔 다스리며 고구려를 평정하고 백제를 병합하여 三國을 통일한 바이다. 이것이 바로「당사(唐史)」에서“인인(仁人)과 군자(君子)와 시서(詩書)의 나라”라고 칭찬한 계기를 만든 것이다.

 인물의 변화함이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상상하기에 넉넉하다. 朴氏의 시조가 개국(開國)한 신라가 5천년 민족사상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자랑으로 여기고 자긍심(自矜心)을 가지는 것이다.

본관(本貫)중 一本도 외래귀화민족 없어 新羅의 朴氏王은 모두 10명, 조선왕조(朝鮮王朝)때만   도 문과급제(文科及第)가 830명이 넘어  
朴氏의 본관은 무려 3백여 본이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박씨의 분포지역을 말함이요, 실지 분명하게 밝혀진 본관은 70 본관 안팎이다.
 

모든 朴氏는 하나같이 赫居世를 유일조(唯一祖)로 모시고 있다.

赫居世 탄생에 대하여는『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제왕운 기(帝王韻紀)』에 많은 기록이 보인다. 이밖에도 赫居世의 생모(生母)가 중국의 제실녀(帝室女)라든지 또 그의 妃인 알영(閼英부인이 용(龍)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느니 하는 말은 어디까지나 전설일 뿐이다.

그러나 제 부족(諸部族)을 통솔한 군장(君長)의 선출을 꾀했던 사실과 군장에 선출되어 시조왕이 되었다는 설(說)에는 이론(異論)이 없을 것이다. 赫居世가 박(瓢)과 같은 알에서 나왔다하여『朴』이라 하였다 하나 실상은『赫』이 방언의『밝』(光明)의 차훈자(借訓字)이므로 후세에 이와 同音인 朴을 성으로 정한 것이며,『居世』란 君長의 위호인『거서간(居西干)』거슬(居瑟=邯)과 같은 뜻으로「赫居世」란‘세상을 밝게 하는 우두머리’명왕(明王), 성왕(聖王), 현지자(賢知者)의 뜻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朴(ᄇᆞᆰ=밝음) 赫(붉다=빛남) 居(ᄀᆞᆺ=우두머리) 世(누리)=【누리를 환하고 밝게 비추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赫居世는 이름이 아닌 존호(尊號)이고, 왕호(王號)는 거서간(居西干) 또는 불구내(弗矩內)로 불렀다.(삼국사기)

어쨌든 朴氏는 2천여 년 전부터 한반도 동남쪽에 뿌리박고 살았던 선주민족(先主民族)의 후예임에 틀림없고, 특기할 만하 것은 一本도 외래귀화민족이 없는 가장 순수한 혈통을 이어온 씨족이라는점이다.

新羅 천년사직(BC 57 ~ AD 935→992년)이 朴·昔·金 3성에 의해 교체 반복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나 약속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그중 朴氏王은 시조왕 赫居世를 비롯하여 남해(南解 2대), 유리(儒理 3대), 파사(婆娑 5대), 지마(祗摩 6대), 일성(逸聖 7데), 아달라(阿達羅 8대), 신덕(神德 53대), 경명(景明 54대). 경애왕(景哀王 55대) 등 10왕이다. 〔석(昔)씨왕은 탈해(脫解 4대)를 비롯 9대~16대까지 8왕이고, 김(金)씨왕은 미추(味鄒 13대)를 필두로 내물(奈勿 17대)에서 효공(孝恭 52대)까지와 마지막 경순(敬順 56대)까지 37왕이다.〕

신라는 사위가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많았는데 대개는 근친혼(近親婚)이 많아서 넓은 의미로는 시조왕을 중심으로 성씨와 관계없이 모두 같은 혈족이었다. 따라서 혈족의 의미가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성씨가 다른 왕이 나와도 동요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사망한 왕을 기준으로 출생순서로 자녀의 왕위계승 순서가 정해지는 것이어서 이전 왕의 성씨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인다.

박씨대종친회는 박문봉(박씨씨족사 연구가)이 제작한‘박씨신라선원세계도(朴氏新羅璿源世系圖)’를 기준으로 삼는데.“이 계도의 내용이 박씨대종친회의 입장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라고 말한다. ※ 선원(璿源) : 왕실의 본관을 높여 일컫는 말.

이 책은 1985년 을촉(건국 38년) 국세조사통계자료를 바탕으로 작성했는데 이른바 8박(9박) 본관을 포함해서 17개 본관의 관조(貫祖)를 중심으로 도표화해놓고 있는데, 시조의 몇 대 후손인지 불분명한 박씨 성을 쓰는 본관 110여 개와 가구 및 인구수도 밝히고 있다.

朴氏의 세계(世系)는 파사왕(破娑王 5대)과 일성왕(逸聖王 7대)대에서 크게 갈렸는데 破娑王系는 뒤에 비안(比安=9세손(光欽)을 중조로), 강릉(江陵=21세손(德興)을 중조로), 면천(汚川=25세손(之坤)을 중조로) 등으로 관적(貫籍)했으며 이 밖에도 영해(寧海), 우봉(牛峰), 해주(海州), 니산(尼山) 등도 파사왕(破娑王)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도 본관조와 파사왕 사이의 중조에 대해서는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일성왕계(逸聖王系)는 통일신라 후기의 명군이며, 그의 25대손인 경명왕(景明王 54대)과 경애왕(景哀王 55대)에서 다시 갈려 경명왕계는 그의 아홉 아들로 각기 분파되었으니

① 밀성대군파〔密城大君派=언침(彦枕)〕: 밀양(密陽), 반남(潘南), 진원(珍    原), 문의(文義), 영암(靈岩), 운봉(雲峰), 창원(昌原), 진주(晉州), 언양(彦    陽),구산(龜山), 태안(泰安), 당진(唐津), 여주(驪州), 평산(平山), 봉산(鳳    山)

② 고양대군파〔高陽大君派=언성(彦成)〕: 고령(高靈)

③ 속함대군파〔速咸大君派=언신(彦信)〕: 함양(咸陽), 삼척(三陟), 보성(寶城)

④ 죽성대군파〔竹城大君派=언립(彦立)〕: 죽산(竹山), 음성(陰城), 고성(固城)

사벌대군파〔沙伐大君派=언창(彦昌)〕: 상주(尙州), 충주(忠州)

⑥ 완산대군파〔完山大君派=언화(彦華)〕: 전주(全州), 무안(務安)

⑦ 강남대군파〔江南大君派=언지(彦智)〕: 순천(順天), 춘천(春川), 여수(麗水), 문주(文州)

⑧ 월성대군파〔月城大君派=언의(彦儀)〕: 월성(月城)

⑨ 국상공파〔國相公派=교순(交舜)〕: 울산(蔚山) 등으로 관적(貫籍)되었고 경애왕(景哀王)계는 그의 후사(後嗣)인

① 계림대군파〔鷄林大君派=입순(立舜) 또는 수현(受玄) 순현(舜玄)〕: 경주    (慶州)와 계림(鷄林)으로 관적(貫籍)을 이루었다.

 이밖에 中祖만 분명할 뿐 어느 파에 속하는지 그 윗대의 계보가 확실하지 않은 본관이 110여 본이 넘는다. 어떻든 모든 朴氏가 신라시조 赫居世의 한 자손이요 천파만손(千派萬孫)은 한 뿌리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이다.

 朴赫居世는 세상에 태어날 때도 나정(蘿井) 우물가에서 백마가 품고 있던 박(瓠)과 같은 알에서 기이하게 태어났다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기이한 전설을 남기고 떠났다. 혁거세가 하늘로 올라간 지 7일 뒤에 오체(五體가 땅에 떨어졌다. 나라사람들이 이것을 합장하려고 하자 요괴한 큰 뱀이 방해를 부려서 할 수 없이 그대로 다섯 부분을 각각 장사하였고 그로 인해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고 이름하였다고 하나 전설일 뿐이다.

 오릉(五陵)은 혁거세와 알영(閼英)부인, 남해(2대), 유리(3대), 파사(5대)가 묻혀진 것으로 전한다. 경내에는 시조왕을 받들어 제향을 모시는 숭덕전(崇德殿)과 내력을 새긴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숭덕전은 세종 11년 기유(1429년)에 명에 따라 전각을 짓고 제향을 올리다가 경종 3년 계묘(1728년)에‘숭덕전’이란 칭호를 받았다. 1959년 기해(건국 12년)‘신라오릉보존회’가 설립되면서 국가에서 주관하던 향사를 박씨문중이 주관하고 있다. 1968년 무신(건국 21년) 박씨종친회와 통합하면서 (사)신라오릉보존회 박씨대종친회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며 1994년 갑술(건국 47년)‘회장’이‘이사장’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명당자리의 후손들은 2천여 년을 두고 번창하여 왔다. 朴氏는 金氏 李氏와 함께 우리나라 3대 姓의 하나로 군림했으며 나조(羅朝) 려조(麗朝)는 그만두고라도 조선조(朝鮮朝) 때의 중요 인물을 살펴보면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만도 830여 명이 넘는다.


지난 2000년도 인구주택 총조사 결과를 보면 총 121만5918가구, 389만5121명으로 집계됐다.( 1만 명 이상인 박씨문중)


순위

본 관

인구 수

 

순위

본 관

인구 수

1

밀양(密陽)

3,031,478

8

영해(寧海)

25,189

2

반남(潘南)

139,438

9

진원(珍原)

23,839

3

순천(順天)

87,631

10

상주(尙州)

23,627

4

무안(務安)

76,817

11

월성(月城)

22,917

5

죽산(竹山)

53,489

12

경주(慶州)

21,602

6

고령(高嶺)

39,239

13

춘천(春川)

16,860

7

충주(忠州)

27,486

14

강릉(江陵)

14,703

밀양 박씨가 전체의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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